
2011년 필리핀 사회를 뒤흔든 이른바 ‘파제로 주교(Pajero Bishops)’ 사건은,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과 정치 권력 사이의 부적절한 금전 관계가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남아 있다.
이 사건은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전 대통령(재임 2001~2010) 시절 은밀히 이뤄졌던 정부 자금 제공이, 그녀의 퇴임 이후인 2011년 여름 새 정부와 언론에 의해 폭로되면서 공론화됐다. 필리핀은 국민 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국가로, 교회의 도덕적 권위와 정치적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런 만큼 이번 사건은 단순한 금품 수수 논란을 넘어, 정교 분리 원칙과 종교의 공공성 자체를 흔드는 중대한 문제로 인식됐다.
정부 복권기금, 주교들의 SUV로?
사건의 핵심은 필리핀 정부 산하 복권공사인 **PCSO(Philippine Charity Sweepstakes Office)**의 자금이 일부 가톨릭 주교들에게 차량 구입 명목으로 제공됐다는 점이다.
2011년 6~7월 열린 필리핀 상원 청문회에서, PCSO의 신임 이사장은 충격적인 사실을 공개했다. 아로요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수백만 페소 규모의 복권기금이 ‘선물’ 형태로 일부 주교들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논란이 컸던 인물은 민다나오 부투안 교구의 후안 데 디오스 푸에블로스 주교였다. 그는 2009년, 자신의 66세 생일을 이유로 대통령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미쓰비시 몬테로 SUV(필리핀에서 ‘파제로’로 불림) 지원을 요청했고, 실제로 약 170만 페소 상당의 차량을 제공받았다.
이외에도 바실란, 아브라 등 여러 교구의 주교 7명 안팎이 차량 또는 금전적 지원을 받은 정황이 드러났으며, 총액은 약 690만 페소 이상으로 추산됐다.
“선의였지만, 결과는 치명적”
문제는 단순한 도덕성 논란에 그치지 않았다. 필리핀 헌법 제6조 29항은 “공금이나 재산을 어떠한 종교나 종파의 사용이나 지원을 위해 지출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이번 사건은 위헌 소지까지 있는 사안이었다.
더 큰 의혹을 불러일으킨 것은 정치적 맥락이었다. 아로요 정부 시절, 가톨릭 교회는 정권의 부패 의혹과 인권 문제에 대해 비교적 온건하고 침묵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 왔다. 사후적으로 밝혀진 차량 제공 사실은, “교회가 정권 비판을 자제하는 대가로 혜택을 받은 것 아니냐”는 의심을 낳기에 충분했다.
이에 대해 당사자 주교들은 차량이 개인적 사치가 아니라 교구의 의료·구호 활동에 사용되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공적 기금이 종교 지도자 개인 명의로 제공됐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문제라는 지적이 우세했다.
이례적인 사과… 그러나 책임은 충분했는가
논란이 확산되자, 해당 주교들은 2011년 7월 초 문제의 차량을 모두 반납하겠다고 발표했다. 푸에블로스 주교는 “필요하다면 작은 차를 타도 괜찮다”며 명예 회복을 강조했지만, 이미 훼손된 교회의 신뢰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같은 달 11일, **필리핀 가톨릭주교회의(CBCP)**는 제103차 정기총회를 열고 공식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CBCP 의장이던 네레오 오치마르 주교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중 일부 주교들이 PCSO 사건에 연루되어 교회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이로 인해 고통과 슬픔을 느낀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CBCP는 해당 주교들의 의도가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하면서도, 세속 권력과의 부적절한 관계에 빠진 점을 분명한 잘못으로 인정했다.
이번 사건은 가톨릭 교회가 은폐 대신 공개 인정과 사과를 택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사과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책임 추궁이나 제도적 개선은 부족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파제로 주교’라는 오명
필리핀 언론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논란의 주교들에게 **‘파제로 주교들’**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파제로는 필리핀에서 부와 특권을 상징하는 SUV로 통한다. 이 표현은 곧 탐욕적 성직자의 이미지로 굳어졌고, 풍자 만화와 비판 칼럼이 쏟아졌다.
평소 교회에 우호적이던 가톨릭 언론과 평신도 단체들마저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강한 실망을 표했다. 일부 신자들 사이에서는 헌금 거부까지 거론되며 분노가 확산됐다.
교회의 도덕적 권위는 어디로 갔는가
‘파제로 주교’ 사건은 단순한 과거 스캔들이 아니다. 이는 종교 지도자가 정치 권력과 재정적으로 얽힐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주는 경고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약자의 편에 서야 할 도덕적 기관이다. 그러나 권력으로부터 특혜를 받는 순간, 교회는 더 이상 비판자의 위치에 설 수 없게 된다. 필리핀 사회에서 이번 사건은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가 어떻게 침묵으로 거래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CBCP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교회가 스스로 설파해온 청렴, 정의, 투명성이라는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 사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종교와 권력의 위험한 밀착이 민주주의와 신앙 모두에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파제로 주교’ 사건은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묻는다.
권력과 재물에 가까워질수록, 교회는 그 존재 이유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